서울 강남구 지명유래
◈개포동
개포란 동명이 붙여진 것은 이 지역에 갯벌이 있다하여 "갯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패"또는 한자명으로 개포라 하였다. 이것은 개포동의 옛 마을 이름으로써 지금도 개패·개포의 옛 지명이 전하여지고 있다.
◈논현동
유래는 논고개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개는 지금의 논현성당 근처이며 특히 강남우체국 위에서 반포아파트까지의 산골짜기 좌우 벌판이 논, 밭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논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논현동의 연혁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논현동이었고 자연부락이었던 언구비(비말)절골, 부처말 등을 병합하여 논고개의 이름을 따서 논현리라 하였다.
◈대치동
동명의 유래는 원래 자연부락 7~8개 마을 중 큰 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한자 명으로 대치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조선 말 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대치동이었는데 일제 때에는 대치리라 하였으며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대치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도곡동
동명 유래는 이 마을 뒤의 매봉산과 물 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어 독부리라 하던 것이 독구리, 독골이 되었다가 도곡으로 변하였다 한다. 어떤 이는 동네 주변 밭에 그릇 깨진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이 마을에 큰 도요(그릇 굽는 가마)가 있어서 흔히들 독골(독, 옹기,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는 마을)로 불려 왔을 것으로 짐작하여 마을의 유래를 살려서 이름을 붙인다면 道谷洞이 아닌 陶谷洞으로 해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삼성동
조선시대 말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봉은사 무동도 닥점 지역이었는데 일제 때인 1914년 3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대치동, 청담동과 함께 수도동사무소에서 관장하였다. (수도동이라는 명칭은 봉은사가 있는 수도산에서 따온 것이라 함) 그 뒤 1970년 5월18일 법정동과 행정동 명을 일치 시킬때 수도동사무소는 청담동사무소로 개칭되었고 1977년 9월1일 청담동에서 삼성동이 분동 되었고 1985년 9월1일에는 삼성로를 경계로 삼성 1,2동으로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세곡동
동명은 1914년 행정 구역을 조정하면서 옛날의 자연 부락 명칭인 세천리와 은곡동의「세」자와 「곡」자를 각각 따서 제정한 것이다. 세곡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이곳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세천리, 은곡동 지역으로서 1914년 3월1일 이곳을 광주군 대왕면 세곡리로 칭하게 되었다.
◈수서동
동명의 유래는 이 동리의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 하여 수서라 하였다. 수서동은 옛부터 궁말 또는 궁촌 이라고도 불리었다. 그것은 이 마을에 조선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 방번 내외와 그 봉사손 광평대군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수서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수서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였으며,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획정 때에도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로 남아 있었다. 1992년 10월1일 일원동에서 수서동이 분동 되었다.
◈신사동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 한강변에 있던 부락 새말과 사평리등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조선 시대 신사동의 자연 부락에 대한 상고에 의하면 이곳에 사평원이라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시장이 형성되어 조선 후기에는 송파시장을 중심으로 이곳에도 그 영향이 미쳐 성행하였다. 또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른 새벽에 도성을 빠져 나와 이곳 사평원에 머물러 의의죽으로 요기한 일도 있었다 한다. 1925년에는 을축년 대홍수로 인하여 주민은 모두 이주하였고, 모래벌만이 남아 있었다.
새말은 한강 동쪽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불리어진 이름으로 일명 신촌이라 불렀으며 새말나루터가 새말에서 한남동으로 건너가는 길목, 즉 한남대교 주위에 있었으며 신사도선장이라고도 하였다.
◈압구정동
조선 세조 때 권신 한명회(1415~1487)가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압구정이 있던 자리는 북쪽의 옥수동과 금호동의 동호 일대와,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선시대 닥나무가 무성했던 저자도가 그림처럼 펼쳐졌으며, 멀리는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까지 시야에 들어와 절경을 이루었다 한다.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언제 자취를 감추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와 결혼한 박영효에게 저자도와 함께 하사되었고 고종 21년(1884) 10월 갑신정변을 일으켜 그가 역적으로 몰려 전 재산이 몰수될 때 압구정도 몰수되어 고종 말년에 다시 찾았으나 언제 없어졌는지는 확실하지가 않고 다만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압구정 터임을 알리는 바위돌만이 우뚝 서 있다. 조선시대 압구정동의 자연 부락은 뒤주니, 먼오금, 옥골, 장자말 등이 있었다. 뒤주니는 압구정 밑에 있는 마을로 압구정을 뒤지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먼오금은 압구정구내에 있던 마을이었고, 옥골은 한강물이 마을 앞에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옥골 뒷산에서는 석기시대 돌도끼가 출토되기도 했었고, 장자말은 옛날 큰 부자가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장자울이라고도 불렀고 기와집이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은 강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업 위주의 마을이었으며 일제 하에서는 배밭 등 과수원을 주농업으로 해온 마을이기도 하다.
◈역삼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역촌이었던 말죽거리,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세마을을 합쳐 역삼리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웃방아다리라는 이름은 즉 방아다리의 웃마을로서 현 테헤란로 부근 국기원 근처 마을이었다. 이들 마을은 띄엄띄엄 자연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5~10여 호 정도가 한 부락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아랫방아다리는 방아다리 아랫 마을로 현 833번지 일대 역삼초등학교 근방에 있던 마을이었다.
◈율현동
동명의 유래는 이 동에서 세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밤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율현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일원동
동명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일원이라는 서원(書院)이 있었으므로 일원 또는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본동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 대모산에 가리워져 [숨어져 있는 마을]또는 [편안한 마을]이라 해서 일원동 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자곡동
자곡동은 이곳의 자연 부락명인 자양도의 「자」자와 지곡동의 「곡」자를 따서 자곡리라 칭한 것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자곡동이 된 것이다. 자곡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원래 이곳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의 자양골(또는 자양동, 쟁골), 못골(또는 목골, 지곡골)로 칭하던 것이 1914년 3월1일에 전국의 행정 구역을조정하면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주군 대왕면 자곡리라 명명했다.
◈청담동
유래는 지금의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에 맑은 못이 있었으며, 또 134번지 일대 한강변의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하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조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청담리였으며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청담동이 되었다.
◈포이동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큰 물이 지면 한강물이 들어와 갯펄이 되므로 그 뜻을 따서 포이리라 했던 데서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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