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논문

윤동주 시인의 기독교 사상(국문학과 졸업 소논문)

청담청수골 2020. 4. 23. 09:54

윤동주 시인의 기독교 사상

(국문학과 학사졸업 소논문-박영섭)

 

 

차 례

 

. 序 論 -----------------------------------------------------1

1.연구 動機 対象 ----------------------------------------------1

2.연구의 目的方法---------------------------------------------1

 

. 本 論 -----------------------------------------------------1

 

1.尹東柱 基督教 思想形成 科程 ---------------------------------1

2.尹東柱 作品에 나타난 基督教 思想 -------------------------------2

1) 삶과 죽음-------------------------------------------------3

2) 八 福----------------------------------------------------3

3) 무서운 時間---------------------------------------------- 4

4) 태초의 아침----------------------------------------------6

5) 또 태초의 아침--------------------------------------------6

6) 十 字 架--------------------------------------------------7

7) 또 다른 故郷--------------------------------------------- 9

8) 序 詩--------------------------------------------------- 10

9) 새벽이 올 때까지----------------------------------------- 11

 

. 結 論 ----------------------------------------------------12

 

참 고 문 헌 -----------------------------------------------14

 

. 序 論

 

1. 研究 動機 対象

 

기독교인으로써 평소 섬기던 목사님이 基督教的로 유신정권에 抵抗하던 를 접하면서 基督教人들의 는 물론 더욱 윤동주 시인의 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우리 民族이 암울한 時代에 지친 이들에게 삶의 용기와 希望을 주고 民族精神과 투철한 愛国心, 抵抗主義, 犠牲精神, 부끄러움의 美学등이 많은 작품에 나타난다. 특별히 본 論考는 그의 작품에 미친 思想들 가운데 기독교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의 자라온 背景을 살펴보고, 그의 作品에 어떻게 나타나고, 어떤 影響을 주는지를 研究하기로 한다.

 

2. 연구의 目的方法

 

研究目的은 윤동주의 思想的 背景이 되는 基督教 思想을 그의 生涯와 작품을 통해서 研究하고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意図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研究方法은 그가 출생하여 자라난 社会背景家庭環境, 学窓時節이 그의 작품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펴본다.

작품에 基督教思想이 어떻게 자리 잡았으며, 특별히 작품가운데 기독교사상이 뚜렷이 나타난 9개의 작품을 聖書基督教적인 象徴語의 의미를 聖経的으로 註釈하고 그 의미가 作品속에 나타났는가를 연구하고 民族主義, 抵抗主義, 犠牲精神, 부끄러움의 美学등에 어떤 관계 속에서 基督教 思想이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論証하고자 한다

 

. 本 論

 

1. 尹東柱 基督教 思想形成 科程

 

尹東柱19171230(음력 1117)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인 윤영석와 김약연 목사의 누이인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小学과정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10년에 장로교 長老였던 祖父 윤아현의 指導하에 태어난 후 수개월만에 幼児洗礼를 받게 되었다. 북간도의 1930년대는 초반부터 거칠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思想문제 뿐만 아니라 経済 政治的으로도 거친 회오리 속에 휩쓸렸다. 윤동주네는 1931년 늦가을에 용정으로 이사를 했다. 용정으로서의 이사는 가족 전체의 어둠으로 다가왔다. 부친 윤영석은 새롭게 시작한 인쇄소며 포목점이 失敗하자 그 충격으로 신앙마저 잃었다. 이러한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윤동주는 적어도 겉으로는 큰 影響은 받은 것 같지 않다. 그것은 명동촌에서 学習信仰과 좋은 성격 때문이었으리라. 1932년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계 학교인 은진 중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봄 연희 전문학교에 入学을 했다. 3년후 일본의 同志社大学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윤동주가 자라난 背景을 친구였던 김정우씨의 글에 아래와 같이 敍述하고 있다.

 

우리는 주일학교도 같이 다녔으며 구주 성탄 때는 교회당이 가까운 그의 집에서 새벽송을 준비하고 밤샘을 하며 꽃 종이를 준비하곤 했다. 옷을 두툼하게 껴입고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개가죽 버선을 신고 새벽 눈길을 걸어다니며 찬송가를 부르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쁘다”.

 

위에서와 같이 윤동주는 집안전체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아버지나 외할아버지가 長老이며 특히 외삼촌인 규암 김약연 목사의 활약으로 명동촌이 순연한 유학 전통 마을이 전 마을이 基督教化 된다. 이러한 家庭環境에서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잘 받고 일제치하와 가정의 어려움에서도 믿음을 지켰다.

윤동주는 시를 통하여 実存意味를 형상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에 대한 준엄한 実存性情神高潔性情緒的 충격으로 응결된 것이 그의 인 것이다. 부끄러움의식의 또 하나의 動因宗教的 原罪意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윤동주의 시를 저항시로, 또는 순수한 내면적 人間苦悩理解될 수 있다. 키어케고어에 의하면 실존은 具体的으로 세 段階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데 첫째 단계의 심미적 실존, 둘째 단계의 倫理的 実存, 셋째 단계의 宗教的 実存을 말하는데 이미 윤동주는 그와 같은 실존적 認識을 스스로 体得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筆者는 윤동주가 幼児期, 幼年期, 少年期, 青年期의 학창시절에도 꾸준히 신앙생활에 熱心을 친구들도 認定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 나타난 그의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적인 信仰告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모두 기독교적인 것만으로 쓰여진 것만은 아니다. 論考는 기독교사상을 나타내고 있는 삶과 죽음, 八福, 무서운 時間,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十字架, 또 다른 고향, 序詩, 새벽이 올 때까지 등의 작품에 나타난 基督教 思想研究하여 보기로 한다.

 

2. 尹東柱 작품에 나타난 基督教 思想

 

1)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새기 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이 작품은 윤동주 에 있어서의 序詩와 같은 작품이다. 윤동주는 어떻게 사느냐 못지 않게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에 더 천작한 시인이다. 산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신앙인에게 있어 특별히 다가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쩌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宗教를 갖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연을 보면 시인은 종말론적 신앙 때문이지, 聖俗을 양분하는 이분법적 사고(영혼은 깨끗하고 육에는 더럽고, 天国은 선하고 世上은 악하다)때문인지 삶을 죽음의 서곡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에서 보듯 이 세상의 삶을 否定的으로 인식하고 있다. 삶은 오늘도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사람들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삶을 고통스러우리만치 진지하게 산 사람, 곧 죽음의 苦痛을 맛보며 산 사람, 그 절정은 그리스도이다)平凡한 인생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처럼 살아보겠다는 시인의 강한 의지가 담긴 라고 볼 수 있다.

 

2) 八 福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永遠히 슬플 것이오

 

八福(심령이 가난한 자, 哀痛하는 자, 温柔한 자, 에 주리고 목마른 자, 矜恤히 여기는 자, 마음이 清潔한 자, 和平케 하는 자, 를 위하여 逼迫을 받는 자)의 시는 윤동주의 宗教的 信念極端的으로 나타난 작품으로 여겨진다. ‘슬퍼하는 자를 여덟 번이나 반복해서 쓴 것은 그것은 슬픔이라는 것이 우리가 能動的으로 택할 수 있는 選択的 情緒가 아니라 宿命的이고 条件的으로 주어져 있는 상황자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시적 戦略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 말미에 영원히 슬플 것으로 끝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슬픔은 극복되거나 치유되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영원성을 획득하며 실존적 조건으로 승화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시를 쓴 당시 상황이 너무나 슬프고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저희가 永遠히 슬플 것이오란 그가 겪고 있는 試錬 또는 민족이 겪고 있는 試錬이 아무리 오래 계속되더라도 참아 낼 것이라는 逆説新約聖経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天国이 저희 것임이요에서 슬픔을 기독교 신앙으로 昇華시켜 나아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슬퍼하는 자는 위로를 약속 받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을 哀痛해 하는 자들이 아니라 自身潔白함과 자신의 의와 자존을 잃은 것을 애통해 하는 자들이라는 것이 성경의 문맥상 명백하다. 자신의 죄가 많다는 것을 슬퍼하는 그와 같은 애통하는 자들은 그들의 슬픔을 덜어 줄 수도 있는 유일한 위로 즉 하나님의 값없는 容恕慰労를 받게 될 것이다.

 

3) 무서운 時間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呼吸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은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덜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이 시의 光景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자세를 보이자, 드디어 신은 드디어 윤동주를 부른다. 마치 범죄 후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아담을 보는 것 같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윤동주도 죄책감에 또는 뵐 낯이 없어 선뜻 신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 윤동주는 자신을 부르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 여기 이렇게 죽지 못하고 살아 있소. 한번도 손을 들어보지 못한 나를, 곧 방황이후 한번도 기도다운 祈祷를 드려보지 못한 나를, 또는 주님 앞에 완전히 항복, 곧 주님께 전적으로 심신을 의탁하지 못한 나를, 따라서 나에게는 이제 기도할, 몸을 의탁할 하늘이 없는데 어디에 네 한 몸 의탁할 신이 있다고 자꾸 나를 부르는 것이오. 제발 나를 부르지 마시오그러나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진짜 속마음은 신에게 다가가기를 소원한다. 비록 그늘이지만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에서 희망의 싹을 엿볼 수 있고, 5연에서 일을 마치고 죽는 날에는 서럽지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하며 아쉬움을 披瀝하는 대목에서는 그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신이 맡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죽는 날에는 서럽게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모세의 謙遜表現이자 솔직한 표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확신을 얻고자 하는 行為로 보인다. 인간이면 누구나 목숨을 내놓는 일을 두려워한다. 아무리 그것이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쉽게 뛰어들 수는 없다.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확실한 召命이 있어야 발을 내딛딜 수 있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당사자인 인간에게 있어 무섭고 떨릴 수밖에 없다. 성경을 보면 아담, 가인, 모세, 예레미야가 그랬다. 윤동주도 聖経人物과 거성들처럼 신에게 나아가 확실한 소명을 받고 민족을 위해 예수님처럼 살기를 소망했지만 솔직히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時代가 너무 어두웠고 모세나 예레미야처럼 살기에는 자신이 한없이 不足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은 결심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을 무서운 時間이라고 붙인 것은 이런 뜻이 있었던 것이다.

 

4) 태초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은 어린 꽃과 함께

 

作品의 시각에 의하면, 세계는 근원적인 모순을 포함한 체 창조된 것이다 서정적 主体가 바라보는 세계 구성원리 자체가 対極되는 두 가지 이미지의 葛藤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초에 아침에 이 세계는 이미 사랑/‘, ’/어린 꽃이라는 갈등의 세력들을 잉태한 채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적대적 갈등의 양상은 신의 뜻이자 계획 속에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인간의 진보적 사유나 실천 행위를 통해 현실적 모순을 타개한다든지 미래를 진취적으로 열어간다든지 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변화는 全的으로 신의 의지에 달린 일이지, 인간의 인식과 실천 속에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서정적 주체의 예지는 이른바 予定‘(섭리)이라는 것에 대한 폭 넓은 肯定과 자기 자신을 지켜 가는 倫理的 完成에 대한 執念으로 옮아가게 되는 것이다.

予定의 바탕 위에서 어떤 計劃이고 서야 한다는 基督教的 世界観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5)또 태초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電信柱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데를 가리우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이 시에는 明示的으로 旧約의 대목이 言及되어 있는데 죄 지은 몸이라는 기독교적 인간 이해가 땀 흘리며 살아야 한다는 原罪 応報受諾으로 이어져 있다. 이 작품 역시 기독교의 創造 神話가 시사하는 상징적 啓示의 요체가 당대의 現実的 질곡과 함께 想像속에서 統合되어 形象化하고 있다. 原罪의 바탕과 樂園 喪失,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계시), 그것이 자신의 삶을 부끄럽게 하고, 苦痛스럽지만 땀 흘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윤리적 준거로 작용한다. 그 윤리적 기준은 이제 윤동주의 宗教的 想像力이 하나의 다다른 結果自己犠牲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6) 十 字 架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尹東柱는 늘 그가 생각하는 대로 行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픔과 갈등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괴로 왔던 사나이라고 한다. <十字架>에 나오는 예수는 직접 状況가운데 뛰어들어 行動할 수 있었기 때문에 人類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원한 周邊人으로서 주위를 서성거릴 뿐 구체적인 状況속으로 뛰어들어가 行動할 수 없었다. 그래서 祖国을 위하여 日帝抗拒하여 十字架를 짊어지지 못함을 뼈아프게 告白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尹東柱는 마지막 연에서 피를 흘리는 희생을 통하여 기쁨을 느껴 보겠다는 실로 비장한 決意를 하고 있다. 암담하기만 하고 자신의 限界를 재삼 확인 할 수밖에 없는 아픈 현실을 사랑하려는 決断없이는 피를 흘리는 犠牲的인 사랑의 決断은 바로 그가 예수의 삶을 따르고자 決心한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사랑의 힘만으로 어려운 現実克服할 수 있다고 믿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 희생을 말하는 그 비장한 각오가 消極的으로 表現되고 있다. 아무도 注目하지 않는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피를 흘리겠습니다告白하는 모습은 謙遜模範을 보인 예수를 따라가는 基督教人에게 있어서 너무도 자연스런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의 代贖으로 特別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십자가의 苦難은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자기부인을 상징하고 있다. 自発的으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이나 필요를 抛棄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옛사람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며 새 사람이 성령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알았지만 자기 심령 속에 그 뜻을 따르기 싫어하는 심성 때문에 그분은 피땀 흘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의 기도는 이미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기 위한 피땀 흘린 기도였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는 이미 그가 알고 있는 기도였으나 마음이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그 뜻에 전적으로 맞추기 위한 기도였다. 피땀 흘린 기도가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은 이미 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순종하여 나를 완전히 위탁하며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의 기도이다. 이 기도가 있는 후에야 진정으로 나는 나에게서 해방이 될 것이다.

윤동주도 예수의 이러한 生涯를 상고하면서 십자가의 고난임과 동시에 날개요, 죽음이면서 부활이요, 실패이면서 승리라는 真理를 깨닫고 예수처럼 되기를 기도한다. 예수처럼 십자가를 저야 하는 일, 犠牲羊이 되어야 한다면 피하지 않고 당당히 죽음을 맞겠다고 희생순교정신이 작품 속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7)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몰래

아름다운 또 따른 고향으로 가자.

 

윤동주에 있어 고향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根源的인 것이자 현실적인 물음을 유발하고 있어 보인다. 우선 우리는 인간에 있어 근원적 故郷을 먼저 상정할 수도 있으리라. 인간에 있어 근원적 고향은 대지의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흔히 현대인의 상실감이라 할 때 봉착하는 문제가 文明에 의해 인간의 본래적 가치의 기반상실을 뜻하고, 이를 고향 喪失感이라 부른다. 둘째로는 실제의 고향이 있다. 이는 누구에게나 자기가 나고 자란 곳을 지칭한다. 이것은 사람에 따라 逃避하고 싶은 증오의 자리일 수도 있고, 모든 추억의 근원일 수도 있으리라. 셋째로 이념의 고향을 상정할 수 있다. 종교인에게는 浄土天国, 사유인에 있어서는 이데아의 세계가, 그리고 범상인에게는 아늑하기만 한 어떤 안주의 자리가 그러할 것이다. 만약 셋째의 宗教人에게서 찿을 수 있는 고향을 논한다면 윤동주는 기독교인으로서 천국을 생각했을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천국은 다시는 収奪이나 搾取圧制가 없는 永遠幸福自由의 나라를 윤동주는 渇望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자의식의 심화와 실존적 자기 초월에의 강렬한 의미지향을 보게 되는데 또 다른 고향에의 귀환이라는 현실적 조건을 넘어서는 절대적 내면에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성경은 本郷을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지고 있다. 聖肉身 事件으로 이 땅에 실제적이고도 종말론적으로 도래했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天国은 이미 도래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主権的統治가 미치는 全 領域을 가르킨다.

 

8) 序 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는 윤동주의 , 또 인간 윤동주의 에 나타난 기독교적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관문 같은 役割을 한다. 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의 瞬間을 기다리며,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容恕와 사랑의 실천을 抛棄하지 않았던 인간 예수의 모습과 정신 세계를 聯想시킨다.

예수는 오늘날 인간 역사의 어디에나, 어느 때나 체험되는 존재로서, 윤동주는 이런 예수를 통하여 삶에 대한 준엄한 정신적 決意表明하고 있다. 윤동주는 예수의 자기 희생과 사랑의 구현을 시인의 소명의식으로 昇華한 흔적이 보인다. 끝없이 志向해야 하는 삶의 올바른 方向과 공간을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이룩하고자 한다. 삶의 괴로움과 사랑의 不在에 대한 자기 의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이 사는 셰계 인식에 대한 엄숙성과 도덕성의 정립도 아울러 보여 준다. 윤동주는 서시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自省的인 인간 완성의 계기를 구축하고 있다. 예수가 인류를 위한 완전한 해방과 救援의 길을 내다보고 있었듯이 윤동주는 현실적 自我완성의 길을 叡智하고 있었다.

예수는 자신의 예정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계획된 하늘의 뜻에 의하여 그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수의 이러한 죽음 인식은 자기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자기의 생명을 잃는 사람은 구하리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역설적 표현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결국 윤동주는 만인에 대한 죽음과 사랑을 수행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를 통하여 인간적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만인에 대한 사랑을 실행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윤동주는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획득되는 진리를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인간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이 곧 나한테 주어진 길을 가야겠다는 성실한 인간의 의지를 표현된다.

윤동주가 서시에서 사랑의 길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길이며, 또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노래한 것은 예수와 윤동주와의 건강한 인간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윤동주는 예수와 동일시된 자신을 분리시켜 되돌아 보며 자아 완성의 길을 걷는다. 그 길에는 마지막 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오늘밤도 바람에 별이 스치우는밤이다. 윤동주는 식민지 시대의 어둠 속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은 예수의 죽음을 인식하고 그 길을 따르려는 의식의 결과로 나타난 . 그의 이러한 죽음 인식은 곧 예수의 사랑의 世界로 나타난다.

 

9)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요.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히시요.

그리고 한 침대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요.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요.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 소리 들려올 게다.

基督教的 終末論을 그대로 詩化한 작품이다. 질곡의 현실로 인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적인 信仰을 갖고 있다.

1-2연을 보면 죽어 가는 사람(악인)에게는 검은 옷(수의), 살아가는 사람(의인,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흰옷(예복)입히라고 말한다. 검은 색은 과 그로 인한 죽음을, 그리고 흰색은 과 그로 인한 영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윤동주는 새벽은 믿는 자에게 있어 어둠의 현실을 초극하게 하는 희망의 등불인데 이는 윤동주의 실존적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근원적인 계기로 받아들여진다. 만일 그에게 이러한 희망과 긍정적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존재의 의의도 찾을 수도 없었을 것이며 사고와 행동은 停止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인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새벽이 올 때까지종말론적인 신앙으로 武装하여 비록 모순과 질곡의 현실이라서 상상하기 어려운 고난에 처하겠지만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세로 한번 義人으로서의 삶을 살아보겠다는 그런 소망을 披瀝한 작품이라 하겠다. 성경에 시편578절에는 내가 깨우리로다의 주석에서 내가 이일에 죽지 않을 것이며, 졸거나 태만하지 않으리로다’ ‘신선한 잠에서 막 깨어나는 자와 같이 가장 생기 있는 상태에 있을 것이다’.새벽이 오면 긍휼히 시작되는 때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그 날을 시작할 것이다.

 

. 結 論

윤윤윤 유윤

尹東柱가 태어나고 자란 명동촌은 그에게 있어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어서 일생을 두고 원형체험으로 작용한다. 民族教育基督教信仰의 양대 기둥 아래서 마냥 아름답고 자유롭고 평화스러웠던 명동촌, 그러나 1930년을 전후해 共産主義의 득세로 말미암아 그 명동촌이 깨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후로 故郷을 그리워하는 故郷意識, 失郷意識, 더 나아가 本郷意識으로 발전한다. 家庭의 몰락으로 어린 시절부터 状況에 따라 자주 移動해 다녀야 했던 사실들은 그의 문학 속에 安定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故郷地理的環境民族主義的인 분위기, 그리고 基督教的家庭 분위기를 통하여 民族主義, 抵抗主義, 부끄러움의 美学基督教 思想으로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삶과 죽음에서 삶이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끝을 終末論的인 사고로 그리고 삶에서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승리한 제자들처럼 살아보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인다. 八 福은 당시의 슬픔을 克復하는 것이 아닌 永遠히 슬픈 것으로 実存的 条件으로 昇華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슬퍼하는 자는 天国을 받게 될 것이라고 逆説한다.무서운 時間은 암울한 어두운 상황 속에서 간신히 살아 남아있는데 헤쳐나가라는 召命을 듣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모세와 같이 謙遜한 모습을 보이면서 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태초의 아침또 태초의 아침에서는 하나님의 創造 歴史予定 摂理를 의식하고 人間原罪로 말미암아 수고하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죄악의 부끄러움과 倫理的 준거로 自己犠牲을 말한다. 十字架는 인간의 죄로 贖罪羊 되신 예수의 十字架를 생각하면서 생각대로 行動하지 못했던 슬픈 葛藤祖国을 위하여 일제에 抗拒하여 現実克復하려는 비장한 覚悟犠牲殉教精神이 나타난다. 또 다른 故郷은 잃어버린 祖国과 잃어버린 故郷想像하면서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또 다른 고향으로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눌림이 없는 永遠本郷天国所望하는 간절함이 있다. 序詩는 하나님과 民族 앞에 모두 죽어 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表現하면서 良心的으로 부끄럼 없는 성실한 自我完成의 길을 의식한다. 새벽이 올 때까지는 인간의 終末論의 입장에서 결국 새벽이 오리라고 생각하면서 새벽은 믿는 자에게는 희망이요, 소망이다. 그 때까지 예수의 再臨을 기다리며 現実의 어두움을 肯定的으로 살아보려는 작가의 태도가 엿보인다.

여러 作品들을 통해 볼 때 윤동주는 大部分 基督教 信仰에 바탕을 깔고 現実을 하나님의 恩寵摂理直視하고, 암울한 現実을 예수 사랑으로 献身적으로 살아가려는 意志를 보여준다. 예수그리스도의 끊임없는 志向意識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면서 그가 志向하는 진정한 자기에로 접근해 간다. 윤동주가 걸어간 自我 完成의 길은 永遠子 하나님의 関係 속에서의 自意識인 양심의 길이었다. 이것은 절대 信仰根拠한 믿음으로써만 可能自己 超克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윤동주의 作品基督教 思想에서만 起因된다고 할 수 없다. 民族主義, 抵抗主義, 純潔意識, 부끄러움의 美学등 여러 思想이 그의 作品에 나타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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