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활용-이야기 중심 설교(1)
출처: 2017. 10. 11. http://www.wpa.or.kr
김 운 용 (장신대 교수, 예배/설교학)
이야기의 힘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한 설교자는 그렇게 설교 계획을 잡았다. 첫째 주는 자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둘째 주는 부모공경과 효도에 대해, 셋째 주는 부부 사랑에 대해, 넷째 주는 가정을 통한 사명에 대한 것으로 주제를 잡았다. 그리고 설교를 계속하는 가운데 셋째 주에 이르러서는 설교자는 부부 사이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비결에 대해 설교했다.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며, 존경이라고, 참으로 행복을 누리기 위해 서로를 향한 진지함과 가슴떨림이 있어야 한다고 설교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가슴 떨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마음이 행복을 만들어 간다고 강조했다.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리함과 익숙함에 젖어 고개만 끄덕일 뿐, 다시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여러 논리적인 주장을 들었지만 설교이니까, 목사님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느 때와 같이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시작했다고 해보자. 다소 설교에서 사용하기에는 길 수 있지만 내용과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전문을 읽어 보자. 만약 설교에서 이 내용을 사용하려 한다면 조금 간추려서 요약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가 저만치서 허름한 바지를 입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방걸레질을 하고 있다.
“여보, 점심 먹고 나서 베란다 청소 좀 같이 하자.”
“나 점심 약속 있어.”
해외출장 가 있는 친구를 팔아 한가로운 일요일, 아내와 집으로부터 탈출하려 집을 나서는데 양푼에 비빈 밥을 숟가락 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아내가 나를 본다. 무릎 나온 바지에 한쪽 다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모양이 영락없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줌마 품새다.
“언제 들어 올 거야?”
“나가봐야 알지.”
시무룩해 있는 아내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가서 친구들을 끌어 모아 술을 마셨다. 밤 12시가 될 때까지 그렇게 노는 동안 아내에게서 몇 번의 전화가 왔다. 받지 않고 버티다가 마침내는 배터리를 빼 버렸다. 그리고 새벽 1시쯤 난 조심조심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내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자나보다 생각하고 조용히 욕실로 향하는데 힘없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갔다 이제 와?”
“어, 친구들이랑 술 한잔했지. 그런데 어디 아파?”
“낮에 비빔밥 먹은 게 얹혔나 너무 답답해서 약 좀 사오라고 전화했는데...”
“그랬어? 배터리가 떨어졌어. 손 이리 내봐.”
아내는 혼자서 손끝을 여러 번 땄는지 손끝이 상처투성이였다.
“이거 왜 이래? 당신이 손 땄어?”
“어, 너무 속이 답답해서...”
“이 사람아! 그럼 병원을 갔어야지! 왜 이렇게 미련하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여느 때 같으면 마누라한테 미련하다는 말이 뭐냐며 대들만도 한데 아내는 그럴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냥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난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내를 업고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내는 응급실 진료비가 아깝다며 이제 말짱해졌다고 애써 웃어 보이며 검사받으라는 내 권유를 물리치고 병원을 나갔다. 다음 날 출근하는데, 아내가 이번 추석 때 친정부터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노발대발 하실 어머니 얘기를 꺼내며 안 된다고 했더니 “30년 동안 그만큼 이기적으로 부려먹었으면 됐잖아. 그럼 당신은 당신 집 가, 나는 우리 집 갈 테니깐.”
큰소리친 대로 아내는 추석이 되자 짐을 몽땅 싸서 친정으로 가 버렸다. 나 혼자 고향집으로 내려가자 어머니는 세상천지에 며느리가 이러는 법은 없다고 호통을 치셨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아내가 없는 명절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는 여유롭게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놓고 태연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그러나 아내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한참 후에 그렇게 말했다.
“여보, 만약 내가 지금 없어져도 당신도 애들도 어머님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을 거야. 나 명절 때 친정에 가 있었던 거 아니야.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 받았어. 당신이 한번 전화만 해봤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야.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바랐어.”
아내의 병은 가벼운 위염이 아니었다. 난 의사의 입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아내가 위암이라고? 전이될 대로 전이가 돼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고? 삼 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유난히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맑았다. 집까지 오는 동안 서로에게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아내를 보며, 앞으로 나 혼자 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문을 열었을 때 펑퍼짐한 바지를 입은 아내가 없다면, 방걸레질을 하는 아내가 없다면, 양푼에 밥을 비벼먹는 아내가 없다면, 술 좀 그만 마시라고 잔소리해주는 아내가 없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아내는 함께 아이들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은 갑자기 찾아온 부모가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살가워하지도 않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공부에 관해, 건강에 관해 수없이 해온 말들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표정에서 약간의 짜증을 읽을 수 있는데도 아내는 그런 아이들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만 있다. 난 더 이상 그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여보, 집에 내려가기 전에 어디 코스모스가 많이 피어있는데 들렀다 갈까?”
“코스모스?”
“그냥... 그러고 싶네. 꽃 많이 펴 있는 데 가서, 꽃도 보고, 당신이랑 걷기도 하고...”
아내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이런 것을 해보고 싶었나보다. 비싼 걸 먹고, 비싼 걸 입어보는 대신, 그냥 아이들 얼굴을 보고, 꽃이 피어 있는 길을 나와 함께 걷고...
“당신, 바쁘면 그냥 가고...”
“아니야. 가자.”
코스모스가 들판 가득 피어있는 곳으로 왔다. 아내에게 조금 두꺼운 스웨터를 입히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여보, 나 당신한테 할 말 있어.”
“뭔데?”
“우리 적금, 올 말에 타는 거 말고 또 하나 있어. 3년 부은 거야. 통장, 싱크대 두 번째 서랍 안에 있어. 그리구... 나 생명보험도 들었거든. 재작년에 친구가 하도 들라고 해서 들었는데, 잘했지 뭐. 그거 꼭 확인해 보고...”
“당신 정말... 왜 그래?”
“그리고 부탁 하나만 할께. 올해 적금 타면 우리 엄마 한 이백만원만 드려. 엄마 이가 안 좋으신데, 틀니 하셔야 되거든.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오빠가 능력이 안 되잖아. 부탁해.”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아내가 당황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소리 내어 엉엉 눈물을 흘리며 울고 말았다. 이런 아내를 떠나보내고 어떻게 살아갈까... 아내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 요즘 들어 아내는 내 손을 잡는 걸 좋아한다.
“여보, 30년 전에 당신이 프러포즈하면서 했던 말 생각나?”
“내가 뭐라 그랬는데...”
“사랑한다, 어쩐다 그런 말 닭살 맞아서 질색이라 그랬잖아?”
“그랬나?”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당신이 나보고 ‘사랑한다’ 그런 적 한 번도 없는데, 그거 알지? 어쩔 땐 그런 소리 듣고 싶기도 하더라.”
아내는 금방 잠이 들었다. 그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도 깜박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커튼이 뜯어진 창문으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여보! 우리 오늘 장모님 뵈러 갈까?”
“장모님 틀니, 연말까지 미룰 거 없이 오늘 가서 해드리자.”
“....”
“여보, 장모님이 나 가면 좋아하실 텐데... 안 일어나면 나 안 간다! 여보?!... 여보!?.....”
난 떨리는 손으로 아내를 흔들었다. 좋아하며 일어나야 할 아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제 아내는 웃지도, 기뻐하지도, 잔소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난 아내 위로 무너지며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어젯밤 이 얘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언젠가 필자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게 짧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그것을 읽은 몇 분이 피드백을 보내왔다. “가슴이 저려옵니다.” “구역 식구들과 그것을 함께 나누며 울었습니다.” “소중한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새롭게 갖습니다.” 이런 반응들은 그 이야기가 감동이 되었으며 마음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어느 애절한 부부의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는 어느 가정의 안방에 서게 되고, 이야기 장면 속에 서게 된다. 나도 모르게 안타까운 어느 부부의 곁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서, 알뜰살뜰 가족들을 위하여 살다가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어느 가족의 일원이 되어 그 가슴 아픈 사연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안타까운 이야기로 인해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에는 그것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야기 가운데로 참여하게 하는 힘이 있고(involvement),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시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힘(identification)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귀를 기울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는 그것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의 자세를 바꾸어 놓기도 하고 그들의 삶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늘 내 곁에 있는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인식할 것이며, 사랑할 시간은 언제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혹 여러 가지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가정에 소홀히 하거나, 가족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마음을 고쳐먹기도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언제나 현재적인 동사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내를 사랑하라’ ‘있을 때 잘해야 한다’와 같은 내용이라도 논리와 명제를 통해 전한다면 그런 감동이나 삶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사고는 관념을 통한 논리적 설명을 통해 인식하게 되는 이성적 사고와 이야기나 이미지를 통해 인식을 갖게 되는 직관적이고 감성적 사고에 의해서 형성된다. 전자는 주로 논증의 형식을 취한다면 후자는 주로 간접 커뮤니케이션 형태인 이야기 나눔(storytelling)을 중요한 틀로 한다. 이것을 두뇌 공학에서는 좌뇌적 방식과 우뇌적 방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설득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이 두 가지는 모두 유용하게 활용되지만 전자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설득적으로 제시하는 특성을 가지는 반면, 후자는 공감을 통해 구체적이고 특수한 내용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추론해 가는 형식을 취한다. 전자는 어떤 내용을 설득적으로 전달하는 교육적인 측면이 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효과적이며, 후자는 삶의 새로운 형성과 변형이라는 관점을 위해서 공감의 측면에 강조점을 둔 커뮤니케이션에 효과적이다. 좋은 이야기는 어떤 진리를 온 가슴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마음 깊이를 터치하는 힘이 있다. 이야기는 진리의 말씀을 직접 삶으로 연결시켜 주는 힘을 가진다.
이야기 활용에 대한 현대 설교학의 논의
이렇게 이야기는 의미로 채워지는 세계를 만들어 갈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가진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렇게 자신의 삶을 의미로 채워가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들으면서 “가장 복합적인 방식으로 인간 경험의 내면적 이야기(the inner story of experience)”를 만들어 간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변화된 삶을 살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이야기는 자연히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 땅에 전하였던 성경 기자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있어 계속해서 이야기로 사용하였다. 구약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랍비들도 이야기를 가장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하였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랍비였던 예수님도 이야기를 통해서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왜냐하면 “기억하게 하고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데에는 신앙교리에 대한 창백한 제시나 설명보다는 이야기가 훨씬 강력한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 가운데서 거닐면서 그들이 서야 할 자신을 위한 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는 “잘못된 우상들과 편견들에 대해서 대항하지만 억압하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영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술수는 쓰지 않는다. 이야기는 강요하지 않지만 이야기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하고, 거기서 함께 만나게 하며, 대화를 나누게 한다. 이야기는 진정한 이상으로 나아가도록 억압하며 끌고 가지는 않지만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조용히 인도한다. 이렇게 이야기는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여 그것을 보게 하고 듣게 하며 경험하게 해 주는데 중요한 도구가 된다. 그래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한 분의 생애를 기억하게 해 주고, 거기에 동참하도록 도와주는 이야기는 숨겨진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소중한 자원이 된다.
이러한 점 때문에 흔히 사람들은 추상적인 교훈은 단 한번이라도 듣기를 지겹게 생각하지만 이야기는 열 번이라도 들으려고 한다.
현대 설교학에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그동안 계몽주의 영향과 함께 주로 논리 중심의 논증적이고 명제중심적인 설교 형태가 주종을 이루어 왔으나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 전달의 가장 중심 매체로 고려하게 되면서,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새로운 형태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초기에 널리 공헌한 사람은 미국 드루대학교 신학부의 교수였던 찰스 라이스(Charles Rice)와 에모리대학교 신학부의 교수였던 프레드 크래독(Fred B. Craddock)이었다. 그들은 설교와 이야기의 상관성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설교에서 이야기 활용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았다. 1980년대 이후 이러한 흐름은 북미의 설교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대중적인 흐름을 정착하게 되었다. 이것은 설교학 진영의 독자적인 흐름이었다기보다는 이론 신학의 진영에서 이야기 신학과 이야기 비평, 혹은 문학비평과 같은 주변의 연구들이 이러한 흐름의 토대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추구는 계속되어 여러 설교학자들에 의한 연구물들이 나오면서 다양한 관점들이 제시되었지만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해 가면서 새로운 설교 형태를 제시하게 된다. 여기에는 “이야기를 통한, 이야기와 같이, 이야기에 의한 설교의 형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발전해 왔다.
이러한 이해와 함께 제시된 모든 설교 형태의 추구에는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활용과 그 특성을 살리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경향에서는 성경은 본질적으로 “이야기로 된 책”(a story book)이며, 성경과 인간 역사, 그리고 인간의 경험에 충실한 설교는 “이야기 나눔이라는 예술”(the storytellers art)을 그 바탕으로 이해한다. 이야기 나눔과 복음의 나눔은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에 속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구원의 복음을 나눌 때 철저하게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유리하는 아람 사람들의 이야기, 이집트의 노예가 되어 노역 가운데 있던 이야기,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야기, 홍해를 건넌 이야기,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 등 본질적으로 복음은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설교학에 추구해 온 이러한 흐름들을 설교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나타났으며, 설교를 일종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storytelling), 이야기 나눔(shared story)”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전에 설교에서 제시된 어떤 사실을 논증하고 예증하기 위하여 사용된 예화의 수준을 뛰어넘어서 이제 “이야기를 설교 그 자체”(the story is itself the preaching)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 말은 이야기는 단지 예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그 자체가 설교의 결론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과 같은 단계가 되어 설교를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야기가 설교 자체라는 의미는 마치 소설가와 시나리오 작가가 소설과 영화 대본 속에 어떤 이야기를 썼다면 그것 자체가 어떤 사실을 전달하는 소통의 방식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연극이나 영화의 말미에 작가가 나와서 “이제 이 연극이 전하려는 의미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라든지, “여기에서 말하려는 요점은 ....이었습니다”라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에서도 어떤 논증이나 설명을 위해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사용되는 이야기 자체가 설교가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특별한 설명이나 논증이 없이도 그 자체로서 메시지를 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는데, 이것을 잔 도미닉 크로산은 “언어의 없어도 되는 특징”(a dispensable feature of language)이라고 지칭하면서 설교에서 이야기의 사용을 “참여를 가져오는 메타포”(metaphors of participation)로 설명한다. 이렇게 설교에서 이야기의 사용은 예화의 수준을 넘어서 설교를 구성하는 부분이 되며, 논리와 명제 중심의 설교, 단순히 성경을 해설해 주는 설교, 어떤 교리나 기독교적 개념을 논증해 주는 설교를 넘어서 설교에서 이야기성(narrativity in preaching)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성경적 설교라 함은 본문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찾아내어 명제를 통한 가르침(propositional teaching)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 사회적 변화와 인식의 변화와 함께 이러한 방식이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되었고, 설교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게 되면서 다양한 형태들이 제시 되었다.
이야기 중심의 설교
국내에서도 다양한 용어를 통해 이러한 흐름이 소개되면서 그 용어 사용으로 인한 일말의 혼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즉, “이야기 설교,” “이야기식(체) 설교,” “설화체 설교,” “서사설교” 등 다양한 용어들이 사용되어 왔다. 근래에 와서 “리버럴 이야기 설교,” “포스트리버럴 이야기 설교”로 설명하는 분도 있다. 이러한 용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현대 설교학에서 논의된 내용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즉, 이야기 자체로 설교를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이야기의 형식을 사용할 것인가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주로 찰스 라이스가 “이야기 설교”(story sermon)라고 명명하면서 제시된 방식이며, 이것은 주로 설교를 이야기로 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소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설교에서 전하려는 메시지를 단순히 한편의 이야기에 담아 전달하는 형식을 주로 취한다. 후자는 이야기가 가지는 특성인 플랏을 통하여 구성하는 설교 형식으로, 모순점을 제기하면서 긴장감을 유발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과정을 가진 후에 반전을 통하여 문제의 실마리를 제시하는 형식을 취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주로 유진 라우리(Eugene Lowry)가 제시한 방식으로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로 명명된다. 이러한 설교 형식에는 이야기가 전혀 사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가지는 특성을 따라 설교를 구성하는 것인데, 문제점 도출로부터 시작해서 심화의 단계를 거쳐, 문제 해결의 단계로 나아가는 플랏을 통해 설교를 구성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여기에 제 3의 흐름도 나온다. 설교에서 이야기를 활용한다는 것은 흔히 자연신학 논쟁에서 제시된 것처럼 일반 이야기로서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온전히 전달될 수 있느냐의 논쟁이 제기된다. 여기에서 찰스 L. 캠벨(Charles L. Campbell)은 한스 프라이(Has Frei)의 이해를 바탕으로 설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설교의 최종적인 귀착점으로서 이해한다. 즉 복음서의 귀착 논리(ascriptive logic)는 언제나 예수님의 이야기였고, 그것이 무시되거나 외면되는 설교,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언급되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이야기로 귀착되는 않는 설교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설교의 형태를 넘어서 설교의 내용, 즉 기독론의 문제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복음서의 귀착적 논리는 설교에서 성경을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것은 기존의 이야기 중심의 설교학이 추구하였던 논의의 한계를 분명히 지적하면서 보완 방법을 제공해 준다. 인간의 보편적 경험으로부터 주워 모은 일반적 지혜가 담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설교를 비평적으로 점검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여기에서 캠벨의 관심은 단순히 서사의 형식에만 매달리는 것보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공적으로 구현”하는 것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설교자는 이야기를 사용하든지 또는 설교에서 전반적인 이야기식의 플롯을 사용하든지 간에 예수님처럼 비유로 이야기하는 이야기꾼이 됨으로서 성경을 연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처럼 설교해야 한다는 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을 따라 가도록 하는 실천적 측면”이 강조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는 단순히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를 어떻게 드러내고 구현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설교로 설명한다. 이렇게 캠벨은 프레드 크래독 이후 20여년 넘게 추구해 온 이야기 중심의 설교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래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초기의 흐름에 대해, 그리고 주로 이야기의 형식(틀)과 플롯에 강조점을 두었던 중간기의 흐름에 대해 보완적인 제시를 하면서 그는 초기의 경향이 일반 이야기에 강조점을 둔다는 점에서 리버럴(liberal)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하면서 특별히 예일 학파의 한스 프라이의 신학을 중심으로 논지를 펼쳐가고 있기 때문에 포스트리버벌 설교(postliberal preaching)라고 명명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대로 그는 설교의 형태론적 측면이 아니라 개념적이고, 원리적인 측면에서 보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주장들은 앞의 흐름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한계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시도였다.
본뜸과 새로운 세계의 형성 사이에서
우리는 이렇게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활용은 진리의 전달에 있어서 중요한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에 깊이 고려해 왔다. 구약의 랍비들이, 예수님께서,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이야기로 설교하라는 주장은 계몽주의 이후 논리 중심의 사고와 설교 방식에 익숙해져있던 설교자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으로 들려온다. 이야기가 가지는 특성은 진리를 감동으로 전달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탁월한 특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것은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 설교자들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 이야기가 아주 강력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듣는 청중으로 아주 쉽게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자기 자신을 만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설교에 성경 이야기 이외에 수많은 다른 이야기들을 포함시킨다. 혹자는 예증을 위한 목적이나 청중들의 분위기 조성을 위한 준비물로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설교의 중심 매체로 고려하는 설교자는 이야기가 성경 본문과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진입로(doorway)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야기는 청중들로 하여금 “성경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다시 우리의 현실로 나오게 만들어 주는 상상의 통로”를 제공해 준다. 이야기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고, 이야기가 시작될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야기의 무대와 동작 속에 자신을 밀어 넣게 된다. 이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는 그 등장인물이 느끼는 것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면서 우리는 어느새 이야기의 주인공과 일체감을 형성하면서 그 자리에 함께 서게 된다. 이제 그들의 고통은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고통이 되며, 그들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로 경험된다. 그래서 승리로 끝나는 영화 “록키”(Rocky)에서처럼 그 이야기에 취한 우리는 이제 기분 좋은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는 “본뜸”(mimesis)과 “새로운 세계의 형성”(mythos)의 특징을 가진다. 이야기가 들려질 때 사람들은 이야기의 세계와 인물, 전달된 메시지를 따라 모사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또한 이야기가 제시하는 진리의 세계를 경험하고 참여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진정한 삶의 변형(transformation)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점이 우리가 설교에서 이야기 사용을 고려하는 이유이다. 이제 어떤 형태로 이야기가 사용되어야 할 것인가는 다음의 논의의 주제로 남겨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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