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교육자료

교사대학(조직신학)

청담청수골 2009. 5. 1. 22:29

<조직신학 강의안>


                                                          

Ⅰ. 신학이란

    

신학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진술이다.


1. 질문하는 학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과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다.


2. 신앙이 전제된 학문이다.

철학의 하나님은 논리적 추문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겪은 하나님인 것이다.

3. 학문이다.

학문이란 이론과 방법론이 필요하다. 신앙과 이성이 필요하다.


4. 실천적 학문이다.

나의 실천이다. 나의 고민, 삶에 관계된 것이다.


5. 찬양학이다.

입을 열어 찬양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든 것이 찬양이다.


6. 자기의 삶으로부터 오는 전기이다.

우리의 삶 전체가 신학이다.


Ⅱ. 조직신학이란?


가. 조직신학의 과제

가)나의 신앙 또는 우리의 신앙 또는 교회의 신앙을 검증하는 것이다.

내가 믿고 있는지, 믿고 있는 것이 성서와 일치하는지 검증한다.


나)교회의 이론, 교리를 만들어가는 학문이고 과제이다.



 다)교리와 교회의 이론을 검증하는 과제를 한다.

예를 들어 카돌릭의 마리아론이 성서적인가 비성서적인가 조직산학이 검증하는 것이다.

 

 라)성경을 체계화, 조직화, 종합화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내용을 명료한 언어로 조직화

 *신앙의 조항들 간에 통일성 내적 필연성을 추구

 *타 영역의 진리주장과의 통일성(문화의 내용속에서 기독교신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것)

 *방대한 신앙고백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하여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성경의 내    용을 조직화하는 것.

 *역사적으로 교회가 학립한 교의나 교리를 체계화

 *재 신학들간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종합진단이다.

  

 마)이단 사상을 검토, 평가한다.


 바)오늘의 현실에 오늘에 문제에 대응하고 대답을 제공한다.

‘신학의 상황성’ 예를들어 환경파괴, 생명문제, 교회부자세습 등에 관한 것.


나. 조직신학의 자료

 1. 성경.


 2. 전통(전승)

 교리 전통, 교회의 교리, 교의 역사신학의 성서들과 관계


3. 현실, 상황, 문화

우리의문화가 받아들이는 진리를 성경의 의미로 받아들이기까지 문화

문화-한 시대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리나 가치의 체계이다.


다. 신학의 규범(표준이 되는 것)

1. 성경

신학을 하면서 언제나 ‘자기 비판적 기능’ 그것이 성경적인가 검증해야한다.


라. 조직신학의 분야


1. 신론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속성등을 다룬다.


2. 성서론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경이ㅡ 해석방법, 성경의 정의, 성경의 역사 등을 다룬다.


3. 기독론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어떤 일을 하셨는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다룬다.

 


4. 성령론

성령의 인격과 사역과 은사의 문제, 성령의 출원을 다룬다.


5. 교회론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과 사명, 교회의 표지(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특성)

교회의 제도, 성례식


6. 종말론

죽음, 역사의 종말, 우주의 종말


7. 이외에 계시론, 창조론, 인간론, 삼위일체론, 예배론 등이 있다.





1. 계시론(2강)

                                                        2005. 09. 30

                                                         박 영섭 목사

가. 계시의 정의

 문자적인 의미 : 감 추인 것이 드러나는 것, 베일을 벗는 것, 인식의 대상이 주체에게 숨겨져 있던 것을 드러낼 때 계시라고 함.

 기독교신학적인 뜻: 창조 안에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수의 인격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낸 것.


나. 계시의 분류


 1. 지혜의 계시

 자기 자신의 하나님의 지혜를 계시하는 것. (예: 창조사건)

 

 2. 이름의 계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계시하는 것. (예: 모세가 출3장에서 소명을 거부할 때 자기 자신의 이름을 밝히신 것). 이름이란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정체성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심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을 자신을 스스로 밝히신 것이다.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은 정적인 분이 아니라 동적이고 행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 한 것은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시는 분이다'라는 뜻을 가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는 구원과 동일하다.

 

 3. 영광의 계시

 어떤 한 사람의 영광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광채, 하나님 자신의 빛나는 광휘를 의미한다. 또 하나님의 장엄하심과 위대하심을 의미한다. '영광'이라 함은 하나님의 미적, 가시적 하나님의 현존이다. 달리 말하면 영광이란 아름다운 하나님의 현존이다. 따라서 영광의 계시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4. 자신의 계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오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드러나신 것이다.


 5. 하나님 나라의 계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신 것이다.

 6. 의지의 계시(하나님의 뜻 계시)

 율법에 하나님의 의지의 계시가 잘 드러나 있다. 십계명, 계약법(언약법) 등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주신 것이다.


 7. 예수그리스도의 계시

 위의 계시들을 통칭 할 수 있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 지혜, 구원, 자신, 의지가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다.


다. 계시의 매개체에 의한 분류(무엇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시느냐?)

    1)말씀을 통해서(주로 선지자를 통해서)

    2)자연을 통해서(바람. 구름, 홍수...) 흔히 자연계시, 창조계시라고 한다.

    3)꿈과 환상을 통한 계시

    4)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5)성경을 통해서

  

*자연계시(실물계시, 이성) 계시 수단이 자연이다(인간의 양심. 역사)

시19:1-2, 롬 1:19-20, 2:14-16 누구나 믿는 믿는 사람들, 본질로서의     하나님(essence, natune)

 자연계시를 통해서 우리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고, 특별계시를 통해서 우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칼빈

 인간 속에 그리고 창조 속에 하나님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이 존재한다. 하나님에 대한 존재에 대한 지식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무지(無知)을 핑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계시의 기능은 우리의 무지를 핑계치 못하게 하는 것이며, 한계는 우리가 구속주 지식을 갖지 못하므로 구원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연계시를 뛰어넘는 특별계시와 우리의 신앙의 눈이 오청된다.  

*초자연적인(말씀계시, 신앙) 계시의 수단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말씀이다. (성경). 요1:1-14, 행4:11-12, 롬 3:21-26, 5:12-21, 빌2:6-11,

 하나님을 믿는 믿는 사람들(하나의 선물), 속성(attribute, dispensation)-특정한 본질이 특별한 상황 속에 들어가는 것)

    

*개혁신학자들 

 자연(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고 하지만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즉, 우리가 알고자 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아니다. 우리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 를 알기 원하는데 이것은 초 자연(특별)계시에 이해서 알게 된다.

  Berkhof

 일반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이나 지혜나 권능에 관한 지식을 다소 가질 수 있으나 구원에 관한 유일한 그리스도를 배울 수는 없다. 구원에 관한 어떤 일반적인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하는데 만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죄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목, 그것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구원의 길, 우리를 변화시키며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감화, 그리고 영적인 생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 등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특수한 지식을 인간에게 드러내 준다.


    Barth : 신 인식

    오직 계시를 수용해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자연계시 불가능하며 또한 우리가가질 수 있는 analogia는 analogia relations(관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즉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비슷한 점이 있다면 하나님 역시 고립이 아닌 관계 속에 있다는 점과 인간도 마찬가지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칼빈

    자연계시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만을 가질 수 있다. 다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이중 지식(창조주와 구속주)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계시를 통해서 우리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고, 특별계시를 통해서 우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라. 계시와 관련된 논쟁점

   

   가)계시가 정보인가? 신뢰와 순종인가?

 하나님에 대한 정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신뢰와 순종을 요구한다.     

   

   나)계시는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

 계시가 독자적으로 먼저 존재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면이다. 계시가 인간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주관적인 면이다.

   

   다)일반계시가 옳은가, 특별계시가 옳은가?

 

일반계시(창조. 타락) - 자연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드러나심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자연이라 함은 인간의질서, 역사, 제도, 인간 이외의 피조물 등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국가제호를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시간 등을 통해서 계시하신다.

 

 * 계시의 대상 : 보편적인 인간이다.

   계시의 내용 : 하나님의 세계창조의 일반적 목적(일반적 진리)제시

 

특별계시(재창조. 구원)-성경을 통한 계시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이다 (참고: 자연계시는 특별계시에 비해서 준비단계이고 구원을 나타낼 수 없는 교육적인(죄를 알게 해주는) 단계이다. 하나님의 완전계시는 특별계시이다)

 

 * 계시의 대상 : 제한적인 하나님이 특별히 택한 사람이다.

   계시의 내용 :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 계획이다.  


   라)계시는 배타적인가? 포용적인가? 다원적인가?

 타종교를 통해서도 계시하시는가? 타종교에는 절대로 계시가 없다는 배타성, 다른 종교에도 조금이라도 계시가 나타날 수 있다는 포용성, 계시가 타종교에 여러 가지가 있다는 다원성이 있다. 배타성은 칼바르트가 대표적이다 포용성은 판넨베르크, 틸리히, 알트하우스 등의 입장인데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으나 구원에 관해서 만큼은 절대로 없다'고 말한다.

다원성은 스미스, 힉, 니터, 트릴취 등의 주장이다 우리 개신교는 배타주의에 머물러 있고, 천주교는 포용주의를 지지한다. 그리고 성서에서도 대부분은 배타주의를 지지한다.


   마)계시는 점진적인가? 종결되었는가?

하나님의 계시는 아직도 있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종결되었는가? 교회와 전통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계시는 계속되고 있다는 입장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드러낼 것은 다 드러내었기 때문에 계시는 종결되었다는 대다수의 입장이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믿음을, 회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을 '계시의 현재화'라고 한다. 이것은 성경과 성령, 교회의 선포를 통해서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는 종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서론(3강)


                                                                    2005. 10. 14

                                                                      박영섭 목사.

성서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는 특별계시다. 66권의 성경은 초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성경은 성경(正經) 으로 된 것이다.


<구약성서>

AD90 Jamria: 유대교의 경전으로 확정(24권) 70인역에서 14또는 15권의 외경을 제외한 24권을 경전으로 확정함.(저자의 권위에 따라 분류-모세오경,예언서,성문서)

우리는 성서의 내용에 따라 39권으로 분류함.


 <신약성서> AD397년 Carthago:교회 회의 통해 정경으로 확립(27권)

 복음서,역사서,서신,계시록


가. 성경의 권위에 대한 부적절한 접근들


1. 성서문자주의

성경의 모든 내용에는 오류가 없다는 입장.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원본 성

경에는 전혀 오류가 없고, 심지어는 번역에도 오류가 없다는 생각(예: 70인역, 불가타역에도 전혀 오류가 없다는 생각) 하지만 분명히 성경이 영감으로 된 것을 인정해야 하지만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2. 역사주의

성경을 역사 자교로만 이용하려는 입장


3. 종교적인 고전으로 봄

성경을 하나의 종교적인 고전으로만 인정하려는 입장


4. 사적인 경건서적으로 봄

성경을 너무나 사유화해서 개인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책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의 능력으로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함에 있어 필요불가결하다.


나. 성경의 영감설


1. 기계적 영감설

하나님께서 성서의 기자들을 기계처럼 사용하셔서 성경을 기록하셨다는 입장. 이것은 주로 초대교회, 고대교회, 정통주의 시대에 나타났던 이론


성서기자들은 하나의 플룻과 같다' '성서 기자들은 타자기와 같다' 따라서 성경에는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1) 성경에는 여러 가지 문체가 있다.

복음서와 서신서는 문체가 다르다. 따라서 기계적인 것은 맞지 않는다.

2) 또 성경에는 인간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예: 연도가 다른 것)

3) 성경에는 인간의 감정들이 드러난다.

이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경험, 체험들이 많이 들어있는 것을 볼 때 기계론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4) 성경자체가 이미 자료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도, 아닥사스다왕의 조서도 그렇다.


2. 자연적인 영감설

순수한 인간의 영감에 의해서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 기록했다는 이론.(하나님의 초자연적

인 개입을 거부함)


3. 부분 영감설

성경이 전체적으로 영감 되지 않고 부분만 영감 되어 있다는 입장.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입장 복음은 영감 되고 율법은 영감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는 귀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고 믿는다.


4. 축자 영감설

문자 그대로 글자 하나하나 영감 되어 있다는 입장. 주로 정통주의가 강조했던 입장으로

기계적 영감과 비슷하다.


5. 유기적 영감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인간들이 기록한 책이라고 또는 입장. 인간의 경험, 체험, 인간의 요소를 결로 무시하지 않으면서, 성서기자들의 개성, 당시의 세계관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성서독자들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내용상 오류가 없도록 하셨다.


다. 성경의 권위


1.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행위, 뜻 등을 기록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2. 예수그리스도를 증언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3. 성 령 의 내적 증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알게 해주시는, 내적 조명을 해주시기 때문에


4. 규범 적 권위

1)신앙의 규범이다. 신앙을 항상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2)행위의 규범이다.


5. 성경은 우리 행위의 척도, 기준이다.


6. 교리, 신조, 그 이외의 모든 기독교 가르침은 성서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고

성경을 그 근거로 해야 한다.


7. 교회의 선포, 교회의 증언 역시 성경을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


<로마교회>교회가 성서의 권위를 주었다고 주장. 교회의 결정과 선택에는 오류가 없다. 성령이 항상 역사하므로 교황의 결정은 오류가 없다(교황무오설)

<개신교> 교회가 성서의 권위에 의지하여 서 있다.

칼빈: 성경은 그 자체 안에서 이미 권위가 있으므로 교회의 결정이란 그 안에 권위를 발견한 것이다.

바르트: 내재적인 성경의 권위 발견하고 인정한 것이 교회의 회의다.


라. 성경의 통일성

성경은 다양하다. 그럼에도 통일적이다. 언어, 시대, 성서기자, 내용도 다양하다. 시대적

으로는 수천 년에 걸친 것을 다루고 있다. 구약과 신약도 차이를 낸다. 그림에도 불구하고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1. 어휘와 주제가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중요한 어휘와 주제(사랑, 구원, 선택, 심판, 용서 등)들은 신, 구약에서 골고루 핵심적

으로 드러나고 있다.


2. 약속과 성취의 관점에서 볼 때 철저하게 통일성을 이룬다.


3. 메시야적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의 약속, 신약은 오신 메시야의 성취이다.


4.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통일적이다.

성경전체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구원의 관점에서 쓰여 졌다. 구약에서도(사사시대 범죄, 구

원, 또 범죄, 또 구원 방식)신약에서도 예수님의 구원이 나타나 있다.


마. 성서 해석의 원칙

성서의 해석

구약(랍비적 해석방법)

미드라쉬-한절한절을 읽어가면서 조직적으로 해석.

 미슈나-전체를 통해 어떤교훈을 주나?

<알레고리적 해석>

초대교회의 보편적 해석방법, 성경의 무자 넘어에 있는 영적인 비유를 찾는 것{밭에 감추인 보화-밭(성서), 보화(그리스도)}

<유형론적 해석>구약성서의 해석방법을 채택(신구약의 유사성) 구약사건은 어떻게 해석하나? 신약사건의 모델과 에표로 해석(모세-그리스도)

<실제론적 해석>

신약의 해석방법, 성서의 이해는 인간들이 당하는 실존, 즉 구체적인 문제나 정황들을 이해하는 것, 그 당시의 정황을 이해중요

<바르트의 해석>

인간의 실존론적인 문제에 관심가짐이 아니라 읽는 인간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해석이 가능하다.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의 대전제 필요

성경을 동양의 하나의 고전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파.


2.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성경본문의 문맥, 맥락을 중요시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많은 목사님들 중에는 성경지식과는 상관없이 말하는 경우가 있다 초대교회의 오리겐의 성서해석은 '알레고리 해석'인데,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무조건 교회와 예수님으로 만 연결시켜 해석 했다.(선한 사마리아인-예수님, 강도만난사람-아담, 강도-악마, 여리고-세계, 여관-교회, 다시 오겠다-재림) ,터튤리안은 문자하나에 영적 의미부여함


3. 신약과 구약을 연결시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이 대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신약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4. 성경을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될 수 있도록 하라.


5. 성경을 과거의 기록인 동시에 오늘의 문제에(현실에) 열려 있는 책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의 영감과 원본 사본 역본에 대한 바른 이해

(성경의 참된 권위 확립을 위한 기초이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여기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란, 첫째로는 성경의 내용 즉 메시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리키며, 다음으로는 성경 자체에 대한 바른 이해, 즉 성경이 무엇이며, 어떻게 기록되고, 전수되어 왔는가 하는 등에 대한 바른 이해, 곧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본문 해석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본문 형성에 관한 것이다. 필자가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후자에 관한 것이며, 오늘날의 본문 비평학도 그 가운데의 한 면이다.


1.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

우선 성경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에 대해서는 디모데후서 3장 15절 이하가 잘 말해주고 있다. 디모데후서 3장15~17절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 본문 가운데에서 성경 자체에 관하여 가장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 본문은 성경의 유일성에 관한 논급으로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15절의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는 오직 성경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특질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는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과학 등 수많은 분야에 관한 책이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은 오직 성경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16절 전반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는 말씀은 성경의 기원에 관한 것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다른 책은 단지 인간인 어떤 저자 만에 의해 기록된 책인 데 대해, 성경만이(모세, 이사야, 마태, 바울 등 인간 저자와 함께)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것이다.


셋째, 16절 후반의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는 세상의 다른 모든 책과는 달리 성경만이 가지는 유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책들은 각기 그 어떤 분야(철학, 역사, 과학, 문학, 예술 등)에 관한 지식을 주는 것인 데 대해, 성경(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썼을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으므로, 본문에서의 성경은 구약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적용 해석할 때는 신약성경도 포함함은 물론이다)만이 인간의 죄를 책망하고, 잘못된 것을 옳게(의로) 바로잡아 주는 책이라는 것이다.


넷째, 17절의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성경의 목적을 가리키는 말씀으로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책과는 달리, 성경은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학자나, 기술자나 예술인 등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간에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즉 성경의 특질, 기원, 내용, 목적은 다 성경의유일성 또는 독특성을 천명한 것으로서,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어떤 성경 본문을 강해하기에 앞서 먼저 성경의 특성에 관한 이 본문을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대한예수교장로회의 12 신조는 그 첫 항에서 성경에 관하여 "신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다"( '유일의 법칙'은 잘못된 표현이다)라고 규정하여 올바른 성경관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이 본문이 담고 있는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신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물론 신 ·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이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란 뜻이 아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도 있지만(예: 창 1:3 "빛이 있으라"), 그 이외에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예: 마 5~7장 산상보훈), 신 ·구약 성경의 여러 저자(모세, 이사야, 마태, 바울 등)의 말이 있고(성경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신약의 서신은 전적으로 저자만의 말이다), 천사의 말이 있는가 하면(창 16:8) 마귀의 말도 있고(마4:3), 동물의 말이 있는가 하면(민22:28) 식물의 말도 있다(삿 9:9~15).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본문 가운데의 말이 실제적으로 누구의 말이든지 간에 그것이 성경에 기록될 때는 저자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둘째,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관하여 정확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적극적인 의미와 소극적인 의미가 있다. 적극적인의미로는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해서만 정확 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이요, 소극적인 의미로는 성경이 신앙과 행위 이외에서는 정확 무오한 말씀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실제적인 내용이 밝혀주는 사실이다. 즉, 앞서 디모데후서 3장15절에서 본대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으로서의 독특한 성격을 가진다. 성경 가운데에는 역사도 있고 문학도 있고 과학(당시)도 있으나, 성경은 결코 역사책이나 문학책이나 과학책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 안에 기록된 역사나 과학에는 일부 오류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이에 대해서는 후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경의 오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본래적으로 역사를 가르치거나 과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부 극단 보수주의자들이 마치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항에 대해 정확 무오한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는 다르며,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해서만 정확 무오한 말씀인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셋째, '유일의 규범'이라는 의미는,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데"(딤후3:15) 정확 무오한 규범이라는 것으로서, 성경의 절대성을 나타낸다. 세상에는 어떤 고답적인 지식을 전해주는 책도 많고, 성현들의 휼륭한 교훈서도 많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절대적인 규범이 되거나,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이 못되며,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규범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부언할 것은, 우리가 말하는 성경이란 신 ·구약 66권을 말하는 것이며, 구약의 정경성에 관해서는 마르시온(Marcion, 2세기의 이단자)으로부터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인 비평도 있었으나, 그것이 잘못된 견해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개신교는 외경(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정경)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2. 영감과 원본에 대한 바른 이해

영감을 의미하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는 데오스(theos, 하나님)와 프네오(pneo, 숨쉰다)의 합성어로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만 한번 나오는 낱말로서, 하나님께서 성경(원본)을 기록하는 사람에게 기록자가 인간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하나님)의 영적인 통제력을 행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영감으로 쓰였다고 할 때, 그 표현은 기록에보다도 기록자(성경의 원저자)에게 초점을 두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21절은 이 사실에 대하여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성경영감설은 일찍이 유대교의 전통과 신약성경(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베드로후서 1장21절 등)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성경관이지만, 종교개혁 때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강한 교황권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다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구호를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그 권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부정적인 성경비평학으로 인해 성경의 영감설 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도전을 받다가 금세기에 와서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에 의하여 다시 그 권위를 되찾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에 관한 논쟁(영감설과 그에 따르는 성경 무오 ·유오설)은 그 후로도 바르트와 불트만 및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논쟁으로 이어졌고, 미국에서는 1929년에 메이첸(G. Machen)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움으로써 프린스턴신학교의 분열을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이토록 신학의 논쟁점이 되어온 성경 영감설은 어떠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제 이 문제를 영감의 성질, 영감의 방법, 영감의 범위 등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자.


첫째, 성경의 영감은 그 성질에 있어서 기계적 영감이 아니고 유기적 영감이다. 극단적보수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는 기계적 영감설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는 성령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아 그들 자신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성령이 지시하시는 대로만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록한 성경의 내용에는 저자 자신들의 개인적인요소(그들의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데 사용된 기계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기적 영감설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개인적인 지식이나 경험, 사상이나 개성 등을 그대로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메시지를 기록하도록 성령으로 감동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그 기록자의 개인적인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즐겨 쓰는 용어나 문체까지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볼 때, 성경의 내용이 밝혀 주는 진실은 결코 전자 즉 기계적 영감이 아니고 유기적 영감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유태인을 위하여 복음서를 쓴 마태는 그가 잘 알고, 또 그의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누가가 당시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 즉 죄인, 여자, 이방인 등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헬라의 이원주의 사상에 대한 요한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가 애용하는 용어로 '빛', '생명', '사랑', '진리' 등이 특별히 많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이 성경의 실제적인 사실에서 저자의 개인적 요소가 다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이러한 개인적인 요소가 추호도 하나님의 영감을 제한하거나 배제하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성경의 영감은 그 방법에 있어서 축자적 영감이 아니고 개념적인 영이다. 즉 성경의 영감은 저자(원본의 기록자, 로마서에서와 같이 원본의 기록자와 저자가 다를 때에는 저자)가 성경(원본)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어휘의 선택이나 자구(字句)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지배하여 조금도 다름(相異)이나 틀림(相違)이 없도록 하셨다는 것이 축자적 영감설인 데 대해, 개념적 영감설은,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하신 영감은 그러한 글자 한 자 한 자에 이르기까지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내용을 개념(의미)상으로만 바로 기록하도록 영감하시고, 어휘의 선택이나 표현의 기술 방법 등은 저자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감이 전자와 같은 것이라면 아무런 논란의 여지가 없고 문제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의 실제는 전자와 같지 않음을 증명해 주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을 몇 가지 실례를 들어 논증해 본다.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성경 가운데, 그 사본이 아니라 원본에서, 동일한 사건이나 사실이 문자적으로 동일하게 기록되지 아니하고 각기 다르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논증을 두 가지만 들어보자.


먼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4복음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세밀한 부분에까지 언급하면 문자적으로 다른 것이 열 곳도 넘지만 그 중 세 가지 사실만 들어 본다.


1. 무덤에 찾아간 사람에 대하여 네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달리기록하고 있다.

마태 :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가 :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

누가 : "이 여자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저회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

요한 : "막달라 마리아"


2. 그들이 무덤에 간 시각에 대하여는

마태 :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마가 :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누가 :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요한 :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3. 무덤에 나타난 실체에 대하여

마태 : "주의 천사"마가 : "횐옷을 입은 한 청년"

누가 :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요한 : 언급이 없음


 위의 예에서 보면, 예 1에서 무덤에 찾아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만이 네 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되었을 뿐 그 이외는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예 2의 무덤에 간 시각에 대해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이라는 점에서는 네 복음서가 공통되나 그 이상의 세밀한 서술에서는 네 복음서가 다 다르다.

 예 3의 무덤에 나타난 실체에 대해서는 기록된 네 복음서가 다 다르다.


다음,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신앙고백의 내용에 대해서도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각각 다음과 같이 달리 기록하고 있다.

마태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가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니이다"

누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위의 예에서 보면 베드로의 고백에서 그리스도라고 한 점은 세 복음서에 공통되나 그 이외는 고백의 내용으로나(마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도 고백), 그 표현에 있어서나(마가에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 처럼, 두 가지의 역사적인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서 복음서는 분명히 세 복음서간에, 또 네 복음서 간에 문자적으로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 즉 성경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공통되고(동일하고) 상치되거나 결여된 것이 없다. 즉, 주님 부활하신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 사람이 무덤을 찾아 갔다는 사실과,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실은 조금도 틀림이 없이 기록하고 있다.


 부활의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한 번 일어난 사건이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는 한번만 있었던 사건으로 믿을진대, 그리고 그 이야기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을 믿을진대, 그 영감이란 축자적영감이 아니고 개념적영감이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경우에 성경 저자에 대한 하나님의 영감을 믿으면서 축자적(문자적)영감을 고집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감의 능력을 제한하는 중대한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그리고 동일한 사건에 대한 복음서 간의 기록이 세밀한 부분에서는 문자적으로 같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의 오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술한 바와 같이 성경의 영감은 저자에 대한 기계적인 영감이 아니라 유기적인 영감이어서 저자 자신의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네 복음서 저자는 모두가 영감을 받아서 기록했으며, 각기 그들의 가진 지식과 경험의 한도 내에서, 다시 말하면 그들의 들은 대로, 본 대로, 아는 대로만 정직하게 기록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경의 메시지 내용을 저자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는 데 있어서 낱말의 문자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영감을 주어 기록하고자 하셨다면, 저자가 기계적으로 영감을 받게 하셨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기록하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소식과,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가르침을 주는 데 있는 것이지, 결코 어떠한 역사적인 보도를 정확하게 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성경의 영감을 그 성질에 있어서 기계적 영감이라고 한다면 축자적 영감이 그 당연한 결과가 될 것이나, 유기적 영감으로 이해한다면 축자적 영감은 논리상 성립될 수가 없으며, 그것이 유기적 영감이요 개념적 영감인 것은 기록된 성경의 실상이 충분히 증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이해가 아니고서야 광야에서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사람의 수를 고린도전서 10장8절에서는 8,000명이라 하고, 민수기 25장 9절에서는 24,000명이라 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셋째, 성경의 영감은 그 범위에 있어서는 부분적 영감이 아니고 전체적 영감이다. 18세기 합리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성경의 영감의 범위를 내용에 따라 구별하여, 영감은 교리적 내용에만 한정되고 역사적 내용에는 영감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성경 안에 있는 역사의 기술에 있어서는 소간 오류가 있기도 하므로 그러한 구별을 하였으나, 역사적인 오류가 결코 성경의 영감의 사실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합당한 이론이 될 수가 없다.

 성경의 저자에 대한 영감은 그 내용이 역사이거나 교리적인 것이거나, 문학적인 장르에 있어서도 산문이거나 시이거나 예언이거나 묵시이거나, 말의 주체가 하나님이거나 사람이거나 심지어 마귀이거나 간에, 성경의 내용의 전 범위에 미치는 것이다(여기마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마귀가 말을 하는 데 영감을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마귀의 말을 바로 그대로 기록하도록 성경의 저자에게 영감을 주셨다고 하는 뜻이다).

 어떤 학자는 성경의 영감을 신약에만 국한시키나 그것도 성경의 내용(딤후 3:16)과 상치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은 창세기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 마지막 절까지 되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영감은 정경에 한정되는 것이므로,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외경(가톨릭 측으로는 정경)의 영감은 인정할 수가 없다.


넷째, 성경의 영감이란, 엄밀히 말하면 원본의 저자에 대한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영감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영감을 받은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영감이사본의 필사자(筆寫者)에게도 주어졌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옳은 견해가 아니 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년은 파피루스, 양피지 사본을 합쳐서 대문자 사본, 소문자 사본, 성서일과표 등 모두 5,500개도 넘는데 그 중의 단 둘도 완전히 동일한 것이 없으며, 바로 이 사실


이 사본의 필사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감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다. 하나님께서 사본 필사자에게, 원본의 저자에게와 같이 영감을 주셨다면 모든 사본이 어떻게 이처럼 다를 수가 있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사본의 필사자에게 영감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본간에 서로 다르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중대한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대다수의 성경학자들은 그들이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언급할 때 사본이나 역본의 영감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을 하지 않는데, 이는 사본이나 역본의 필사자나 역자에게 영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여서 도무지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독자들이 만일에라도 오해를 할까하여 사본의 필사자나 역자에게 영감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 사례를 셋만 들어본다.

 미국의 유명한 보수주의 신학자인 루이 벌코프(L. Berkhof)는 그의 책 「성경해석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이 모든 세부분에까지 완전무오하게 영감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다만 원본만을 언급하는 것이며, 지금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사본들이나 현대판 성경이나 번역본 들을 같은 의미에서 언급한 것은 아니다"

피녹크(C. H. Pinnock)는 그의 책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변증」에서 "영감은 성령에 의해 영감된 사람들이 구술했거나 기록한 말씀에 관한 것이지 사본의 필사에 관한 것이 아니다"「기독교대백과사전」(기독교문사 간행)은 영감에 대하여 "영감은 성서의 진리 주장을 확실히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본이 아닌 원본(친필들)과 관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필사자들의 잘못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감이 성경의 원본의 저자에게만 해당된다는 데 대해서 더 이상의 증명이 필요치 않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본의 실태를 보아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사본  필사자에게도 영감이 있었다고 억지 이론을 고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가공할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름지기 겸손하고 정직하지 않으면 안된다.



3.. 맹목적 보수신앙의 모순성좌 위험성

이상에서 우리는 성경의 영감과 원본, 사본, 역본 등에 관한 중요한 점들을 고찰해 보았거니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그 어떤 신학이론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신학이론도 성경을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소위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기초하여 신학이론을 세우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들 나름대로 어떤 신학이론이나 교리를 정립해놓고 그것에다 성경의 본문을 적용시키는 과오를 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한 가지 실례가 성경의 영감과 원본, 사본, 역본 등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그리하여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도, 무조건 성경의 영감을 철저하게만 주장하면 그것이 마치 가장 좋은 신앙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영감은 사본 필사자에게도, 나아가서 성경 번역자에게도 되었다고 고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의 고집은 이미 위에서 밝힌 대로 사본이나 역본의 실제와는 다르므로 그것이 무식의 소치가 아니면 맹목적인 신앙일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말해서 만일 사본의 필사자에게 하나님의 영감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수천 개의 사본이 다 같지 아니한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그들은 곧잘 대답을 회피하고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라고만 말한다. 그러나 어떠한 학문적인 이론을 주장, 즉 논단을 하는 데 있어서는 충분한 논증을 해야 하고, 그 논증에는 바른 논거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논거나 논증도 없이 논단만을 내세우는 것은 이 얼마나 맹목적인 신앙의 발로인가?

이러한 맹목적인 신학이론은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다른 신학이론에 정면으로 모순 되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사본 필사자에게 영감이 되었는 데도 그 결과가 그렇게 다르다면 하나님의 능력에한계가 있다는 말밖에 안되니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사본 필사자에게 대한 영감을 주장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게 된다면 이야말로 영감설에 대한 과오보다도 더 큰 과오(신관에 대한)를 범하는 것 아닌가?


만일 그들이 사본 필사자나 역자에 대한 영감과 사본 자체나 역본 자체(내용)에 대한 영감을 혼동한다면 그것 또한 어이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성경 원본의 저자에게 영감을 받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 신앙과 행위에 관한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 되는 그 내용이, 영감이 안된 사본 필사자나 번역자의 실수나 착오로 극히 적은 일부분이 일치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전수되어온 것은 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본 필사자나 성경 번역자의 실수나 착오로 야기된 극히 적은 부분의 차질은 추호도 성경 전체에 대한 영감성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완전성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원본이 없고 사본과 역본만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지 않은가?


 성경의 원본이 없는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그 원본이 경건한 사본 필사자의 최선의 노력으로 필사되어 그 메시지가 오늘의 우리들에게까지 전수된 것은 또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한편 성경의 본문(사본)이 오랫동안 본문비평학자들에 의하여 원본에 더 접근되고, 그것에 따라서 오늘날 점점 더 성경이 잘 번역되고 있는 것 또한 다행한 일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셩경의 번역본이 과거의 어느 시대의 번역 성경보다도 원본에 가깝게 번역된 것임을 믿고 자부해도 좋다.


 우리는 성경이 사본 필사자나 번역자에게까지도 영감이 되고,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항에 대한 척도가 되며 문자적으로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야말로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원본에도 서로 불일치한 점이 있으며, 사본의 필사자나 번역자에게는 영감이 없으므로 사본간의 불일치가 있고 번역상의 오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이나 역본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정확무오한유일의 규범이라고 하는 데에 진정으로 성경의 권위가 바로 세위지고, 성경이 바로 이해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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